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슬 갑옷 (문단 편집) == 형태 == 사슬갑옷의 기본은 '사슬로 만든 셔츠'다. 유럽인들은 hauberk(호버크)라고 불렀던 사슬로 만든 셔츠는 보통 무릎에 닿을 정도로 길게 만들어서 상체와 하반신을 두루 보호했는데, 다리의 활동성과 말에 탈 때를 대비해서 앞과 뒷부분은 밑자락에서 가랑이까지 세로로 갈라놓았다. 짧게 만든 것은 haubergeon(호버젼)이라고 불러야 옳지만 호버크와 호버젼을 서로 혼동해서 쓰는 일이 많은 편이다. 반소매 티셔츠마냥 짧고 헐렁하게 만들던 팔(소매) 부분은 1100년대에 이르면 손목까지 길게 이어지고 몸에 잘 맞는 형태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1175년 이후부터는 팔 부분이 손목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루 모양에 엄지만 따로 나와있는 벙어리장갑(mufflers)을 사슬로 만들어서 손을 덮을 수 있게 해놓았다. 벙어리장갑은 팔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연결이 되어있는 형태이고, 손바닥 쪽은 덮지 않기 때문에 벗기면 사슬갑옷의 손목에 매달려있게 된다. 머플러는 전투에 임박했을때에만 끼는 것이다. 나중에는 가죽장갑과 사슬을 꿰매어붙인 완전한 건틀렛 형태도 고안된다. 1250년 이전까지 사슬로 된 후드(머리를 덮는 부위)는 호버크에 붙어있는 것이었지만, 1250년대부터 이 부분은 분리형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coif는 중세에 쓰던 머리가리개의 일종이므로 사슬로 만든 것은 mail coif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 호버크와 코이프 둘 다 마찬가지로 목 부분은 끈이나 버클 따위로 단단하게 조여서 빈 틈이 없도록 단속했다. 사슬의 유연성 때문에 메일 코이프로만 머리를 보호하는 일은 드물었고 대개 코이프 위에 노르만 투구, 그레이트 헬름, 슈거로프 헬름, 케틀햇, 배시넷 등등의 투구를 썼다. 처음에는 코이프와 투구를 겹쳐서 사용했지만, 투구로 충분한 방어를 얻을수 있는 상태에서 굳이 투구가 가려주는 부분까지 사슬을 덮을 필요는 없기 때문에 투구에 사슬의 드림을 달아놓는 camail 또는 aventail 방식으로 변해간다. 사슬로 만든 목 주변을 덮어주는 방어구는 pixane이라고 한다. 사슬의 시대 초창기에는 다리는 그냥 가죽이나 리넨의 바지로만 보호를 했으나, 1100년대 이후부터는 완전무장하는 맨앳암즈는 사슬로 된 스타킹 같은 형태의 다리 보호구를 입어서 발까지도 보호를 했다. 이 스타킹은 chausses라고 부르는데 허리에 맨 벨트에 [[가터벨트]]로 연결해서[* 스타킹이 본래 남자 귀족의 옷이었기 때문에 가터벨트 또한 남자의 물건이었다. 당시 기준으로 전혀 이상할 것이 아니다. 모양새도 위 그림과 같이 평범했다.] 고정을 했다. 현재는 다리 부분의 사슬 방어구는 쇼스라고 통틀어서 말하지만, 허벅지 부분은 chaussons, 무릎부터 그 아래 부분은 chausses라고 분리했던 시절도 있었다. 호버크가 대개 무릎길이까지 오기 때문에 chaussons를 보기는 어려운 편이고, 둘을 합해서 그냥 쇼스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구조 상 쇼스나 코이프 같은 분리되는 부분을 제외하면 하중이 어깨에 실리게 되는데, 셔츠같은 유연성덕에 벨트를 착용해 무게를 골반으로 분산시킬 수 있었다. 메일의 무게는 보통의 갑옷 수준이며 유연하고 통기성이 좋기 때문에 행동을 제약하는 면은 없지만, 하중이 모두 어깨에 실리는 것은 착용자의 피로도를 높이므로 벨트를 꼭 착용했다. 처음에는 호버크 바깥에 뭔가를 입는 일은 없었으나, 1190년 경 부터는 호버크 밖에 느슨한 외투 - jupon이나 surcoat를 걸치기 시작했다. 서코트는 소백의(cotta) 위에 입는다는 의미의 프랑스말에서 온 것이며, 사실 대부분의 복장과 마찬가지로 기사 전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중세에 일반적이던 보통의 외투 종류다. 대개 소매가 없거나 짧고, 다른 옷 위에 겹쳐입는 오버코트 형태이고 남녀가 모두 착용했다. 사슬과 마찬가지로 말에 탈때를 대비해서 앞뒤가 가랑이까지 트여있는 것이 보통이다. 사슬갑옷 위에 입은 서코트는 원래 비나 습기가 사슬에 바로 닿는 것을 막아주고 태양광선이 바로 사슬에 닿아서 달아오르는 것을 막아주는 외투의 역할에 충실했는데, 후에는 여기에 자신의 문장을 넣기도 한다. 이게 와전되어서 그냥 문장을 넣는 옷인 것으로만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그 반대이다. 사슬은 베기에 대한 저항력이 우수하지만, 매우 유연한 갑옷이기 때문에 찌르는 공격이나 타격에 의한 충격력을 흡수할 수 없었기에 이에 의한 부상을 피할 수는 없었다. 다만 일단 갑옷이기 때문에 통념처럼 찌르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슬을 촘촘하게 만들어 둔 웬만한 제대로 만들고 정비 잘 한 사슬 갑옷은 '''그 당시의 화살 등의 찌르는 공격이 사슬 틈 안에 잘 박히지 못했다.'''[* 노르만 기사나 바랑인 친위대 같이 특별히 두꺼운 사슬갑옷을 입는 병종은 화살로는 죽일수 없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실제로 페체네그족의 멸망으로 이어진 베로이아 전투에서 페체네그 기병의 화살비는 동로마군의 보병과 기병을 모조리 돈좌시키는 위엄을 보였지만, 황제가 직접 인솔해 돌격한 바랑인 친위대에게는 전혀 피해를 주지 못했다.] 그러나 찌르기에 치중한 검이나 보드킨 촉처럼 매우 뾰족한 날붙이는 사슬의 틈새로 밀려 들어가서 박히기 때문에 찌르기에 약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또한 맨살 위에 입으면 피부가 사슬에 긁히고, 둔기 공격을 맞으면 둔기 타격에 더해서 '''부러진 사슬이 살에 파고 들어버리니''' 사슬 밑에는 거의 반드시 가죽으로 된 옷을 입거나(고전 시대의 로마의 적이 쓰던 방식) Wambais, Aketon, Gambeson 등으로 부르는 패드를 넣은 [[천 갑옷]]을 먼저 입고 그 위에 사슬을 걸쳤다. 이것을 입으면 충격을 어느정도 흡수해줄 수는 있으나, 그래도 공격을 몸으로 완전히 받아낼 수는 없으니 방패로 막거나 움직여서 피해야 한다. 본래 갑옷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상을 덜 입기 위해서 쓰는 것. 중세의 병사들에게 있어 사슬갑옷은 대체로 우수한 방어도구이며 있으면 아주 좋은 것임은 확실하다. 사슬갑옷을 전신으로 한벌 다 맞추고 투구와 방패를 구비하면 다른 갑옷 부러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전신 세트를 한벌 맞추는 것은 몹시 비쌌기 때문에 부유한 [[맨앳암즈]]나 기사계급 만이 사슬 갑옷 한 벌을 다 맞출 수 있었고, 가난한 하급 전사나 보통 병사들은 상의만 걸치거나 그냥 천으로 된 누빈 갑옷을 입을 수 밖에 없었다. 도검이나 철판 등 다른 금속에 비해 무게당 공기와의 접촉면적이 엄청나게 넓은 탓에 녹 또한 매우 잘 스는 물건이었고, 식초를 들이부은 통 안에 모래 따위와 함께 넣고 굴려 모래로 겉을 갈아내는 방식으로 녹을 제거하고 손질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녹슨 부위가 갈려나가며 사슬 자체가 작아지는 거라서, 오래되면 처음에 비해 얇아지고 방어력과 내구도도 저하되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